틀리지 않는 법 (조던 엘렌버그, 2016) 독후감 - 수학은 숫자에 갇혀 있지 않다
틀리지 않는 방법이라는 책 제목이 매력적이다. 수학적 사고를 갖추지 않으면 빠지는 함정을 에피소드로 소개한다. 하나하나 다 재미있다. 정답을 맞히는 방법이 아니다. 틀리지 않는 방법이다. 수학다운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가?
수학도 비슷해. 넌 수학에 중점을 둔 직업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건 괜찮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하지만 그래도 넌 수학을 할 수 있어. 아마 지금도 수학을 하고 있을 거야. 비록 그걸 수학이라고 부르진 않더라도 말이야. 수학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 깊숙이 얽혀 있어. 그리고 수학은 네가 어떤 일들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 수학을 아는 것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의 겉모습 아래에 숨은 구조를 보여 주는 엑스선 안경을 쓰는 것과 같아. 수학은 우리가 틀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과학이고, 그 기법들과 관습들은 수백 년에 걸친 고된 노력과 논쟁을 통해서 밝혀진 거야. 네가 수학의 도구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 세상을 더 깊게, 더 올바르게, 더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어. 네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규칙과 약간의 기본 전술을 가르쳐 줄 코치 혹은 책이야.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 물어보는 딸기부엉이에게 이 답을 건네주면 만족할까?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다. 이런 훌륭한 교양서를 쓰는 수학자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왜 배워야 할까? 체육, 국어, 영어, 과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집요하게 묻는 걸 본 적이 없다. 유독 수학만 그렇다. 논리로 짜인 현실과 구분된 세계로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과 떨어진 세계로 느낀다. 논리로 닫힌계를 훌륭하게 구축해서 오히려 벽을 느낀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 묻는 딸기부엉이가 수긍할 답변을 책에서 찾지는 못했다.
선형 추론과 미분
선형적 추론은 어디에나 있다. 만일 무언가를 갖는 게 좋은 일이라면 그것을 더 많이 갖는 건 더 좋은 일일 거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선형적 추론을 하는 셈이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고 매체도 그렇고 추론의 도구를 빌리면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게 선형 추론이다. 그만큼 함정에도 자주 빠진다. 미분을 ’국소적으로는 직선, 대역적으로는 곡선’으로 표현하다니 글솜씨가 좋은 수학자의 필력에 감동했다.
표본이 충분히 많은가?
수학에서는 꼭 지켜야 할 위생 법칙이 하나 있다. 어떤 수학 기법을 현장에 적용하여 시험할 때는 같은 계산을 다른 방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하라는 것이다. 만일 그때마다 다른 답이 나온다면, 기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위생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겠구나. 데이터 오염 혹은 표본에 있는 변이에 저항을 가질 수 있는 법칙이다.
작은 학교들이 상위 25등을 휩쓴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시험 점수에서 더 큰 변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에서는 천재가 몇 명 나타나거나 3학년 중 농땡이 치는 학생이 몇 명만 나타나도 학교 평균이 크게 흔들리는 데 비해, 큰 학교에서는 소수의 극단적인 점수들이 미치는 영향이 큰 평균에 녹아들기 때문에 전체 점수를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
변이가 평균에 녹아들 만큼 충분히 큰 수인가? 통계를 볼 때, 표본의 크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도시별로 뇌종양 비율처럼 특정 사건의 1등과 꼴등이 있다면 인구수가 적은 도시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한다.
어떻게 50% 확률을 향해 나아가는가? 큰 수의 법칙?
동전에게는 기억이 없다. 따라서 다음 번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가능성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50대 50이다. 총 비율이 50%로 다가간다고 해서, 운명의 손길이 이미 나온 앞면을 상쇄하고자 다음에는 뒷면을 선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동전을 더 많이 던질수록 지난 열 번의 시도가 점점 덜 중요해질 뿐이다
독립 시행인데 총비율이 50%로 다가간다는 게 와닿지 않는다. 이해한다기보다는 외운다는 느낌이다. 이것도 수학의 힘일까? 증명된 걸 뇌에 하드코딩으로 새겨놔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실처럼 말이다. 납득되는 설명을 들었다. 지난번의 시도가 점점 더 덜 중요해지는 걸 큰 수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연속으로 동전의 앞면이 몇 번 나왔던 시도가 많아질수록 지난번의 결과가 중요해지지 않고 동전을 던지는 순간의 50% 확률이 중요해진다.
접시보다 큰 파이
〈지난주 나온 일자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에서 일자리가 고작 18,000개 창출되었으나 그중 절반이 여기 위스콘신에서 생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작업이 효과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순 일자리 증가량처럼 양수도 될 수 있고 음수도 될 수 있는 수를 퍼센트로 보고할 때 자칫 빠지기 쉬운 궁지를 보여 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18,000개의 일자리 창출 결과 식에는 덧셈도 있고 뺄셈도 있다. 위스콘신에서 일자리 9,500개가 창출됐다고 해서 절반을 차지한다는 건 악의적으로 음수를 숨기는 행위다. 어떤 주에서 40,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다른 주에서는 50,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사기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사기가 통하는 것은, 훌륭한 마술 트릭이 무릇 그렇듯이, 당신을 대놓고 속이려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수법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들진 않는다. 참을 말하되, 당신이 그로부터 부정확한 결론을 끌어내도록 유도한다. 주식을 열 개 연속 제대로 고르거나, 마술사가 경주마 여섯 마리를 찍어서 매번 승자를 정확하게 맞히거나, 뮤추얼 펀드가 시장에서 10%의 수익률을 낸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로 확률이 낮은 사건이다. 다만 확률이 낮은 사건을 접했을 때 놀란 것이 당신의 실수다. 우주는 방대하기 때문에, 발생 확률이 낮은 사건에 놀랄 태세를 갖춘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그런 사건을 만나게 된다. 확률이 낮은 사건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례가 재미있었다. 10번이나 연속으로 답을 맞춘 사람이라면 정말 쪽집게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맞은 답을 보낸 사람들을 다시 그룹으로 나눠서 각기 다른 답을 보내는 과정을 반복하면 마지막까지 정답을 보낼 수 있는 그룹을 만들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모수가 충분히 크기만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언제나처럼, 이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비록 확률에 대한 형식적인 개념은 몰랐지만, 〈일어나기 힘든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 점을 이해한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말장난 같지만 음미할 필요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이다.
수포자가 나오는 허들
첫 번째는 초등학교에서 분수를 배울 때다. 그전까지 아이들에게 수는 0, 1, 2, 3…… 같은 자연수였다. 〈몇 개인가요?〉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수였다. 많은 동물들도 이해한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원시적인 이 개념으로부터 갑자기 훨씬 더 넓은 개념, 수가 〈무언가의 일부〉를 뜻할 수도 있다는 개념으로 도약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극단적인 전환이다
분수를 가르칠 때 ’지식의 저주’를 경험했다. 분수는 개념 도약이 이뤄지는 극단적인 전환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처음 배우기에 정말 어렵겠단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위험한 지점은 대수를 배울 때다. 대수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 대수 이전에는 우리가 곧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알고리즘 방식으로만 연산을 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방식에서 우리는 덧셈 상자나 나눗셈 상자에 어떤 수들을 집어넣은 뒤 손잡이를 돌린다. 그러고는 상자 반대편에서 나온 수를 답으로 보고한다. 대수는 다르다. 대수는 거꾸로 하는 연산이다.
거꾸로 하는 연산이라 대수를 가르칠 때, 고생하겠구나.
귀류법
내심 거짓이라고 믿는 무언가를 참으로 가정하는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논증 기법이다. 이것은 모순에 의한 증명, 혹은 귀류법이라고 불린다. 귀류법은 수학적 유도(柔道)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 사고 도구를 사용하는 데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을 쉽게 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단순한 귀류법은 2의 제곱근이 무리수임을 보여 주었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증명, 패러다임을 박살내는 어마어마한 충격이라서 그 발견자를 죽여야만 했던 그 증명을 가능케 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증명은 더없이 단순하고 세련되고 간결하기 때문에,
귀류법으로 2의 제곱근이 무리수임을 증명하는 글을 봤을 때, 정말 우아하다고 느꼈다.
얼마나 낭비하는 게 바람직한가?
한마디로, 사회 보장국은 이미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마지막으로 남은 약간의 실수까지 없애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하는 것은 값비싼 대가가 따르는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유틸을 헤아릴 경우,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우리는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하는가?〉가 아니라 〈납세자들의 돈을 얼마나 낭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이다. 스티글러의 말을 빌리자면, 정부가 낭비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부의 낭비를 막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최적화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시각의 변화. 낭비를 막기 위해 추가로 지불하는 비용이 낭비보다 많다면 최적의 해가 아니다. 정치와 수학이 싸우는 영역이다.
기하학을 복권 숫자 고르기에 사용한다고?
과학의 역사가 거듭 보여 주듯이, 수학적 우아함과 실용적 효용은 긴밀한 짝이다. 가끔은 과학자가 이론을 발견한 뒤 수학자에게 그것이 왜 우아한지 밝혀 달라고 넘기고, 또 가끔은 수학자가 우아한 이론을 개발한 뒤 과학자에게 그것이 어디에 쓰일 만한지 밝혀 달라고 넘긴다. 사영 평면이 쓰일 만한 작업 중 하나는 사실주의 회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복권 숫자 고르기다.
우아한 사영평면이 복권 숫자 고르기와 관련있다고?
사영 평면의 기하학을 다스리는 것은 두 가지 공리이다. 임의의 두 점은 딱 하나의 공통된 선에 속한다. 임의의 두 선은 딱 하나의 공통된 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하학이었다. 어느 숫자 쌍이든 정확히 한 장의 티켓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어느 두 점이든 정확히 하나의 선에서만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비법은 그저 유클리드였다. 이제 우리는 유클리드가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점들과 선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기하학에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연결할 수 있다니.
파노는 기하학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고, 대신 어떤 현상이 기하학처럼 행동하는가 하고 물었다
우리가 도무지 유클리드 공간처럼 보이지 않는 계에 관해서도 기하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발상, 심지어 그런 계를 〈기하학〉이라고 떳떳이 부를 수 있다는 대담한 발상은 알고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상대론적 시공간의 기하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더 나아가 요즘 우리는 인터넷의 풍경들을 지도화하는 작업에도 일반화한 기하학적 발상들을 적용하는데, 이것은 유클리드가 이해할 만한 기하학으로부터 한참 더 멀어진 일이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근사한 점이다.
유연하고 대담하고 현대적이다. 어떤 현상이 기하학처럼 행동하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기하학의 점령지를 넓혔다.
해밍 부호에 기하학이 숨어있다고?
하나의 부호어는 파노 평면에서 하나의 선을 이루는 세 점들의 집합과 같다는 것, 이것이 해밍 부호에 숨은 기하학이다. 서열 중 한 비트를 바꾸는 것은 점 하나를 더하거나 지우는 것과 같고, 원래 부호어가 0000000이 아닌 이상 망가진 전송 결과는 점이 두 개 혹은 네 개 있는 집합에 상응한다. 만일 당신이 점이 두 개만 있는 집합을 받는다면, 당신은 사라진 점 하나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받은 두 점을 잇는 유일한 선에 놓인 세 번째 점이다. 만일 〈선 하나 더하기 잉여의 점 하나〉의 형태로 점이 네 개 있는 집합을 받는다면? 그러면 당신은 그 점들 가운데 하나의 선을 이루는 세 점이 올바른 메시지에 해당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파노 평면을 설명할 때, 이게 뭔가 했다. 이걸 해밍 부호와 연관지을 때 소름이 돋았다. 기하학이다.
유클리드와 피타고라스가 논했던 거리가 훗날 평면 기하학에 적용된 것처럼, 해밍은 평범한 거리를 새로운 정보의 수학에 적용한 셈이었다. 해밍의 정의는 간단했다. 두 블록 사이의 거리는 한 블록을 다른 블록으로 바꾸기 위해서 교체해야 하는 비트의 개수와 같다. 따라서 두 부호어 0010111과 0101011의 거리는 4다. 전자를 후자로 바꾸기 위해서는 2, 3, 4, 5번째 자리에 있는 비트들을 바꿔 줘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수학자들은 항상 이런 필수 함수를 정의한다. 수학적 사고를 지탱하는 벽돌같다고 느꼈다.
따라서 우리는 부호어로부터 최대 1 해밍 거리만큼 떨어진 서열들을 해당 부호어를 중심으로 삼은 〈해밍 구〉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부호에 오류 정정 기능이 있으려면, 서로 다른 두 부호어와의 거리가 동시에 1 미만인 서열이(기하학적 비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존재하면 안 된다. 달리 말해, 서로 다른 두 부호어를 중심으로 삼은 서로 다른 두 해밍 구는 서로 공유하는 점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오류 정정 부호를 만드는 문제는 구 쌓기라고 불리는 고전적인 기하학 문제와 구조가 같아진다. 구 쌓기란 똑같은 크기의 구들을 서로 겹치지 않게 하면서 좁은 공간에 최대한 빽빽하게 집어넣는 방법을 찾는 문제이다
오류 정정 부호를 만드는 건 좁은 공간에 구를 최대한 빽빽하게 집어넣는 방법을 찾는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 기하학은 최고의 시각화 도구이다. 오류 정정 부호를 만드는 걸 눈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간결성에는 대가가 따른다. 영어가 기본으로 제공하는 오류 정정 기능이 사라지는 것이다. 로는 좁고, 붐비고, 사람들 사이에 공간이 별로 없는 엘리베이터이기 때문에, 로의 각 단어는 수많은 다른 단어들과 몹시 가까워서 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로에서 〈색깔〉을 뜻하는 단어는 bofab(보파브)다. 하지만 한 글자만 바꾸면 〈소리〉라는 뜻의 bogab(보가브)가 된다. bokab(보카브)는 〈전기〉를 뜻하고 bolab(볼라브)는 〈맛〉을 뜻한다.
언어도 오류 정정 기능을 탑재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간결성을 추구하는 인공 언어를 만들었더니 한 글자만 바뀌어도 뜻이 획획 변한다. 기하학에서 언어의 오류 정정 기능까지 알아보다니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기하학으로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자
정의상, 부자인 것은 부유한 주 출신인 것과 대충 양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부유한 주 출신인 것은 민주당을 찍는 것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부자인 것은 당연히 민주당을 찍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하학적으로 말하자면, 벡터 1과 벡터 2가 예각을 이루고 벡터 2와 벡터 3도 예각을 이룬다면 벡터 1과 벡터 3도 예각을 이뤄야 하지 않을까?
기하학적으로 상관관계를 표현하면 반례를 손쉽고 이해하기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데카르트 이래 수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대수적 묘사와 기하학적 묘사 사이에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멋진 자유를 누리고 있다. 대수의 이점은 형식화하거나 컴퓨터에 입력하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기하학의 이점은 우리의 타고난 물리적 직관을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Covariance(공분산)을 구하는 방법이 생각났다. 두 변수의 Deviation(편차)를 곱한 값의 Mean(평균)으로 구할 수 있는데, 이는 곧 편차 벡터들의 내적을 평균낸 값이다. 벡터로 변환해서 생각할 수도 있는 게 재미있었다.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단 말이야? 위대한 업적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수학 교양서를 쓰는 사람들이 해주는 값진 일이다.
그러나 상관관계는 추이적이지 않다. 오히려 〈혈연관계〉와 더 비슷하다. 나는 아들과 혈연관계이고, 아들은 내 아내와 혈연관계이지만, 아내와 나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더 나아가 상관관계가 있는 변수들이 〈서로 DNA의 일부를 공유한다〉고 상상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맞다.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낮에는 증명하고 밤에는 반증
여기에 관해 상식처럼 이야기되는 조언이 하나 있는데(나는 이 조언을 내 박사 학위 지도 교수로부터 들었는데, 그는 또 자기 지도 교수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어떤 정리를 증명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면 낮에는 그것을 증명하려 애쓰고 밤에는 반증하려 애써 보라는 것이다
증명과 반례를 번갈아가며 한다. 와! 이런 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다.
만일 어떤 명제가 실제로 참인데 당신이 그것을 반증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를 나쁜 것으로 여기도록 배웠지만, 모든 실패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패에서 배울 수 있다. 당신은 명제를 한 방식으로 반증하려고 애쓰다가, 벽에 부딪힌다.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다가, 또 다른 벽에 부딪힌다. 당신은 매일 밤 시도하고, 매일 밤 실패하며, 매일 밤 새로운 벽에 부딪히는데, 만일 당신이 운이 좋다면 그 벽들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기 시작할 것이고, 그 구조는 바로 그 정리가 참임을 보여 주는 증명의 구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왜 자꾸 반증에 실패하는가 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방식에 따라 왜 정리가 참인지를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낮에는 증명하고 밤에는 반증하는 습관은 수학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이 습관은 우리가 품은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철학적 신념에 압박을 가해 보는 수단으로도 유용하다. 낮에는 우리가 믿는 것을 믿자. 그러나 밤에는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명제를 반박하려고 노력해 보자. 대충 해서는 안 된다! 가능한 최대한, 사실은 믿지 않는 명제를 믿는 것처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시도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기존 신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것을 왜 믿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증명에 한 발 더 다가갈 것이다.
정말 무서운 습관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실을 낸다. 이게 틀리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 포용하고 선입견을 품지 않으며 마치 바이너리 서치처럼 양쪽에서 정답을 찾아 나간다.
마치며
수학의 교훈은 단순하다. 이 교훈에는 숫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그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으므로 감각이 안겨 주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의 직관은 형식이라는 외골격을 입었을 때가 입지 않았을 때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은 것이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아지지는 않음을 이해할 때, 혹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도 기회가 충분히 많이 주어진다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볼티모어 주식 중개인의 유혹을 물리칠 때, 혹은 가장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만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들을 다 떠올린 뒤 어느 것이 좀 더 확률이 높고 어느 것은 좀 더 낮은지 고려하면서 결정할 때, 혹은 집단의 신념은 개개인의 신념과 동일한 규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버릴 때, 혹은 여러분의 직관이 형식적 추론이 깔아 둔 도로들을 따라서만 내달리도록 풀어 줄 때, 여러분은 방정식 하나 안 쓰고 그래프 하나 안 그리면서도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수단을 동원한 상식의 연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걸 언제 써먹겠느냐고? 여러분은 태어난 순간부터 수학을 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부디 잘 사용하기를.
수학을 숫자로 한정 지을 때, 수학을 배워서 어디에 쓰냐는 질문이 나온다. 숫자가 드러나지 않는 수학에 매일 노출되어 있다. 세상에는 구조가 있으며 우리는 그걸 직감으로 해석한다. 형식을 제공하는 게 수학이다. 직관을 더 강화한다.
틀리지 않으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적극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그냥 답이 없다고 포기해 버리거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라고 게으르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틀리지 않는 게 답을 내지 않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기하학에 매력을 느꼈다. ’조던 엘렌버그’가 지은 ’기하학 세상을 설명하다’ 책도 읽어보고 싶다. 확률과 통계에 약하다는 걸 관련 챕터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다른 주제의 챕터보다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낮에는 증명하고 밤에는 반증하는 습관을 가져보고 싶다. 패시브 스킬처럼 동작한다면 이것만큼 사기 스킬이 없는 것 같다.
글을 잘 쓰는 수학자는 고마운 존재다. 수학 교양서를 재미있게 읽었다.
밑줄
- 선형적 추론은 어디에나 있다. 만일 무언가를 갖는 게 좋은 일이라면 그것을 더 많이 갖는 건 더 좋은 일일 거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선형적 추론을 하는 셈이다.
- 병원 회복실을 가보면, 가슴에 총알구멍이 난 사람보다 다리에 구멍이 난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가슴에 총을 안 맞기 때문이 아니다. 가슴에 맞은 사람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표어는 다음과 같다. 수가 음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퍼센트를 논하지 말라.
- 우리는 세상에서 보는 현상들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야 적당할까?
- 이때 〈아무 영향도 안 미치는〉 시나리오를 귀무가설(歸無假說)이라고 부른다. 귀무가설은 곧 당신이 연구하는 개입 조치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가설이다.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자는 종종 귀무가설 때문에 잠을 못 이룰 것이다. 귀무가설이 제대로 기각되지 않는 한, 자신이 의학적 돌파구를 쫓고 있는지 잘못된 대사 경로에 헛다리를 짚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 통계학 명명법이 동트던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려, p 값이 0.05 미만이라는 피셔의 기준을 통과한 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눈에 띄〉거나 〈통계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편이 어떤 효과의 존재를 알려 줄 뿐 그 규모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이 기법의 진정한 의미에 좀 더 충실한 이름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언어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 내심 거짓이라고 믿는 무언가를 참으로 가정하는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논증 기법이다. 이것은 모순에 의한 증명, 혹은 귀류법이라고 불린다. 귀류법은 수학적 유도(柔道)라고 할 수 있다.
- 그보다는 우리가 이 사고 도구를 사용하는 데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 강력한 힘을 쉽게 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단순한 귀류법은 2의 제곱근이 무리수임을 보여 주었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증명, 패러다임을 박살내는 어마어마한 충격이라서 그 발견자를 죽여야만 했던 그 증명을 가능케 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증명은 더없이 단순하고 세련되고 간결하기 때문에,
- 우리는 증거로부터 어떻게 진실을 끌어내야 할까? 네이만과 피어슨의 놀라운 대답은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통계학의 목적은 무엇을 믿을지를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할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통계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학문이었다. 유의성 검정은 책임자에게 신약을 승인할지 말지, 경제 개혁안을 시행할지 말지, 웹사이트를 꾸밀지 말지에 대한 답을 알려 주는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
- 우리가 데이터를 아무리 많이 모으더라도, 날씨를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는 엄격한 한계가 있다. 로런츠는 그 한계를 약 2주로 생각했다. 그동안 전 세계 기상학자들이 힘을 합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한계를 의심할 이유는 없는 듯하다.
- 복권을 사도 좋을까? 일반적으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현명한 답이라고들 한다. 옛말에 복권은 〈바보들에게 물리는 세금〉이라고 했다. 복권을 살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의 돈으로 정부가 수입을 올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 그들의 접근법은 도박이 재미있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단순한 금언을 따랐다.
-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예술적 성공은 재능과 운의 결합이고 따라서 평균으로의 회귀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 다윈은 우리가 목적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발전을 얼마든지 유의미하게 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골턴은 우리가 바탕의 원인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연관성을 얼마든지 유의미하게 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그러나 상관관계는 추이적이지 않다. 오히려 〈혈연관계〉와 더 비슷하다. 나는 아들과 혈연관계이고, 아들은 내 아내와 혈연관계이지만, 아내와 나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더 나아가 상관관계가 있는 변수들이 〈서로 DNA의 일부를 공유한다〉고 상상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 〈다수결〉은 간단하고 깔끔하고 공정한 기법으로 느껴지지만, 단 두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할 때만 최선의 기법이다. 선택지가 둘을 넘어서면, 다수결의 선호에 모순이 스미기 시작한다.
- 수학은 우리에게 원칙적인 방식에 따라 확신하지 않을 방법을 알려 준다. 〈거참〉 하고 포기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는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며, 확신하지 않는 정도는 대충 이 수준입니다〉라고 굳게 단정하도록 해준다. 혹은 더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확신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 인간은 모순을 어느 정도까지는 견딘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말했듯이, 〈일류 지성을 시험하는 잣대는 반대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머릿속에 간직하면서도 계속 기능할 줄 아는 능력이다〉.
- 일단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를 모두 믿자. 거기에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덤불을 쳐내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분리하며, 모순되는 두 가설을 마음속에 나란히 놓아 두고서 각각을 대립되는 상대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실이, 혹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진실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가 선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 여느 과학 도구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도구는 특정 종류의 현상은 감지하지만 다른 종류는 감지하지 못한다. 일반 카메라가 감마선을 감지할 수는 없는 것처럼, 상관관계 계산은 이 산포도의 하트 모양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두 자연적 혹은 사회적 현상이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길 바란다. 그것은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상관 계수가 감지할 수 있는 종류의 관계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